자리배치 Place Arrangement

“자리배치(Place Arrangement)” installation view / 2001

 

이 작업은 정독도서관 휴게실의 자리 배열을 바꾸는 것이다. 휴게실은 도서관 열람실처럼 일렬로 배열되어 모두 한 곳 만을 쳐다보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기존에 있던 좌석과 화분의 자리를 재배치하여 다양한 공간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Unseen and familiar rules of space were put into question when the seats were rearranged in the restroom of Jeongdok Public Library. Positions of flowerpots, tables and chairs were moved to many directions so that, visitors may choose whatever position they want to be seated in. There are various models of arrangements on the wall. Now that the place is no longer subject to the rules. And people can move freely.

 

“Place Arrangement” installation view / 2001

 

 

제안으로서의 미술

김형진(문화평론가)

 

작품의 설명은 언제나 작품을 만들어 낸 사람 쪽에서 모색되어 왔다. – 롤랑 바르트, “저자의 죽음”, <텍스트의 즐거움> 중.

롤랑 바르트는 고전적인 의미의 ‘문학작품’을 부정하는 일련의 글들- “저자의 죽음”, “작품에서 텍스트로”-을 통해 유일하고 동일한 저자에 의해 통제되는 ‘작품’이 아닌 독자의 능동적인 ‘읽기’ 행위를 통해 복수로 확장되어 가는 ‘텍스트’의 존재를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미술이나 디자인에 있어서도 이러한 주장은 가능할 것인가? 이 질문은 곧바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우선, 작가의 쓰기와 독자의 읽기 행위는 모두 언어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비해, 미술가 혹은 디자이너의 작품제작과 관람객의 관람행위는 서로 다른 영역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작가와 독자는 모두 같은 말을 통해 소통하는 주체임에 비해 미술가와 관람객, 디자이너와 소비자 사이에는 그 공통언어의 공간이 좀처럼 생성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술은 영원히 작가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가? 관객은 “자신의 속내 이야기를 털어놓는 저자”의 말을 일방적으로 경청하는 위치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그리하여 독자의 탄생에 버금가는 관객의 탄생을 기대하기란 영 어려운 일이 될 것인가?

2001년 4월, 서울의 오래된 동네 화동 2번지에 위치한 정독도서관 매점에서는 탁자와 의자를 다시 배치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한 줄로 정렬되어 있던 탁자와 의자는 매점 공간 가득히 흩트려졌다가 다시 모아지고, 또 다시 흩어지고 있었다. 결국, 여러 가지 시험 배치가 끝나고 이 시험 배치들에서 보여졌던 요소들을 종합해 매점 공간의 재배치가 완성되었다. 이름하여 <자리배치>. 정독도서관을 이용하는 유저user들에게 건넨 젊은 작가 박용석의 ‘제안’이었다.

<자리배치>는 원래 그해 4월 11일부터 4월 25일까지 정독도서관에서 있었던 전시 <無限光明(무한광명)새싹알통强推(강추)>에 출품된 작품이었다. <공장미술제>로 대표되는 젊은 작가들의 등용문의 하나로서 자신을 표방한 이 전시에는 모두 58명의 작가가 참여했으며 박용석도 그 중 한명이었다.  매점 이용객들은 이 낯선 제안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자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이 새로운 배치에 반응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더 편리하고 유용한 방식으로 탁자와 의자의 위치를 또다시 변경함으로써 작가의 제안에 능동적인 대답을 건네 왔다.   이것을 작품이 아닌 ‘제안’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데에는 수사학적 겉멋 이상의 이유가 있다. <자리배치>는 물리적 실체가 있는 미술품이 아닌 이런 저런 시안만으로 이루어진, 말 그래도 제안이었다. 또한 관객, 이용객이 작가의 제안을 마음껏 변경할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도 <자리배치>는 작품으로 불리기에 어색함이 있었다. 미술의 비물질화(dematerialization)는 70년대 미국을 주름잡았던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 속에서 이미 충분히 발전되고, 실험되었던 이상이다. 그러나 이들이 역사적인 양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비물질적 미술들 역시 미술관으로 포섭되어 하나의 미술품, 물질로서 고착되었다. 이를테면, 이들의 아이디어를 적은 노트가 작품으로 전시되는 식으로 말이다. 관객의 개입이라는 양상 역시 이상만큼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미술관에 가면 작품앞에 쓰인 이런 문구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은 원래 관객의 참여에 의해 작동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원래는 그랬다는 말이다. 지금은 아니고.  롤랑 바르트의 설명처럼 작품의 설명은 언제나 작가에게서 찾아지기 마련이며, 만약 작품의 구조가 작가 이외의 누군가에 의해 변경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특정 작가의 작품으로 불리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질문들을 던져보아야만 한다. <자리배치>에서 작가는 어디에 있는가? 이 제안에 있어 작가만의 원안original plan은 과연 존재하는가? 원안과 시안tentative plan의 구분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질문들에 대답하는 것은 곧 미술에 있어, 그리고 디자인에 있어 관람객, 수용자의 위치와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또 다른 질문을 불러오게 된다.   사실, 디자인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미술에 있어서도 관객, 수용자의 위치란 보잘 것 없다. 아무리 미술가들이 관객과의 소통을 원한다고 떠들어댄들, 대부분의 경우 그 소통은 작가 자신만의 독백으로 끝 날뿐 수용자의 목소리가 적극적으로 그 작품의 의미 형성에 도움이 되는 경우란 극히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미술관이 아닌 공공장소에 설치되는 작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클라이언트와 작가 사이에 수용자가 끼어들 틈이 존재하는가? 수용자의 공간인 공공장소에 클라이언트의 요구와 작가의 주장으로만 가득 찬 작품을 던져놓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 공공미술의 현실인 것이다. 이런 경우 미술품은 수용자의 보행을 방해하는 물건에 지나지 않게 된다.

작가 박용석의 제안, <자리배치>에서는 이러한 모든 도식들이 의식적으로 거부되고 있다. 이 작품에 있어 작가의 오리지널한 원안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것은 단지 최초에 제기된 의견일 뿐, 그 이후에 벌어지는 수용자에 의한 변형을 가로막거나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 있어 수용자와 함께 또 한명의 제안자 일뿐, 작품의 의미를 형성하는 유일한 주체로서 등장하지 않고 있다. 작업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자리배치>의 가장 적극적인 의미는 바로 작가의 제안과 수용자들의 적극적 개입이라는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수용자들이 매점의 공간을 다른 식으로 인식하고 그 공간의 배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자체가 이 작업의 의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작가와의 인터뷰를 참조)   같은 작가가 2000년부터 진행 중인 <녹색 드로잉> 작업 또한 마찬가지다. 이 작업을 위해 제작한 엽서에는 “옥상 물탱크에 그림을 그려드립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자신의 휴대전화번호가 적혀있다. 자신의 물탱크에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은 누구라도 이 전화번호로 연락을 할 수 있으며, 작가는 그들을 직접 방문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직접 선택하고, 작가는 단지 그들의 이미지를 실현화하는 과정에 자신의 육체를 빌려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한 사람들은 단순한 수용자를 넘어 클라이언트, 그리고 또 한사람의 제안자로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업에서 과연 작가는 누구일까? 이미지를 제안한 시민? 녹색 그림을 그려주고 있는 박용석? 전통적 의미에서 작가가 구상과 실현이 통일되어 있는 주체를 말하는 것이라면, <녹색 드로잉> 작업에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흔히 미술과 디자인은 클라이언트의 유무에 의해 그 영역에 나누어진다고들 말한다. 다시 말해 미술은 디자인에 비해 클라이언트의 입김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작가 자신의 구상과 아이디어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미술가들은 클라이언트들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을 만족시켜야할 강박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리고 이런 특성이 미술을 보다 자유롭고,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매체로 만들어온 것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용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최종적으로 채택된 디자인을 접하게 되는 소비자나, 미술가의 개인적 고뇌에 의해 선택된 이미지를 관람하는 관객이나 그 중간과정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아무리 소비자의 기호를 중시하는 디자이너의 작품이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미술작품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미지 생산, 선택의 과정에서 그 천한 말석의 자리라도 차지하고 앉을 수 있는 수용자는 거의 없어 보인다.   앞서 살펴 본 <자리배치>와 <녹색 드로잉>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작가의 고독한 선택 대신 수용자의 명랑한 참여를 지지하고 있다는 점. 작가가 생산한 이미지를 강요하지 않고 수용자가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중재자 역할, 한 사람의 제안자 역할에 자신을 국한시키고 있다는 점.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더 이상 작품이 아닌 텍스트로서의 미술, 작가가 아닌 제안자로서의 미술가의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