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조형물을 위한 추상적인 옷 Abstract Patterned Clothes for Sculptures

“공공조형물을 위한 추상적인 옷(Abstract Patterned Clothes for Sculptures)” installation view / Clothes on Sculptures / 2003


“우리가 쉽게 공공미술로 부르고 있는 것은 대부분은 공공미술이 아니다. 우리는 이 점부터 인식하고 출발해야 한다. 공공미술로 불려지는 것의 절대 다수는 사실은 화랑이나 작업실의 것과 마찬가지로 사적 미술이며 단지 공공 공간에서 초라하게 살고 있을 뿐이다, 이들과 관련된 전통적인 위치나 위대한-종종 과장되어 있다-스케일은 그것이 공공적이거나 기념비적이기를 바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아, 슬프도다. 그들은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일 뿐이다. 그들은 단지 크기만 한 사적 미술작품 이다.”

제리 알렌, ‘어떻게 예술이 공공성을 획득하나’ 1985, 킹카운티예술협회

“Much of what we call public art simply isn’t. We must acknowledge that from the beginning. The overwhelming majority of public artworks are simply private artworks-gallery or studio pieces-“slumming it” on a plaza or in the lobby of some public structure. Their traditional placement and their grand (and open exaggerated) scale gives rise to the expectation that they should be public in content, or monumental in terms other than scale. Alas, they are wolves in sheepskins. They are only big private artworks.”

From “How Art Becomes Public,” by Jerry Allen, King County Art Commission, 1985.

 

 

“Abstract Patterned Clothes for Sculptures” installation view / Clothes on Sculptures / 2003

 

공공미술(public Art) 어찌보면 우리의 일상현실에서조차 풍경은 붙박이로 고정된 지리적인 개념을 넘어선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요즘 사이트란 말이 위치, 장소 등의 뜻으로 쓰이기보다는 인터넷의 ‘싸이트’를 의미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싸이트’ 주소들이 그렇듯 사이트는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관계를 통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재확인한다. 사이트는 언제라도 이사할 수 있으며(간단한 주소변경만으로), 순간적으로 도둑맞을 수 있고(해킹으로 인한 마비로),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검열에 의한 폐쇄로). 무엇보다 우리시대의 풍경은 근본적으로 ‘모바일(mpbile)’하다는 속성을 갖는다. 지난밤에 흥겹고도 떠들썩하게 놀았던 얘기를 다음날 친구에게 일종의 무용담으로 전하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카메라 폰은 그 생생한 배경을 제공한다. 사이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떠내서 즉시 옮겨질 수도 있게 되었다. 이렇게 전면적을 모바일해진 도시 풍경 안에서 같은 조각품들이 도심의 여러 곳에 존재하고 있는 상황은 아이러니하게 보인다. 미술관과 갤러리 안에서도 길거리에서도 건물 안에서도 우리는 크기만 다를 뿐인 같은 작품들을 본다. 속도의 정의에 따르면 가장 빠른 속도는 같은 존재가 동시에 다른 장소에 있는 것, 다시 말해서 이동시간이 제로인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시대의 가장 빠른 속도는 매스 미디어를 통해 편재하고 있는 이미지에게서 얻어진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같은 조각품들은, 도시 이곳 저곳에서 동시에 흘러나오는 대형 빌보드의 광고 이미지의 카운터파트로서, 모바일한 도시풍경을 페러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이다. 박용석은 마로니에 공원의 울타리 안에 놓여있는 추상조각품들을 위한 옷을 만든다. 원래부터 이 작품들이 환경조각으로 만들어 졌는지 아니면 그 재료의 속성상 야외에 설치되었는지는 기록에 잡혀있지 않다. 다만 1984년도에 세워졌다는 마로니에 조각공원의 ‘유해’가 아닌지 추측해볼 뿐이다. 그 시절에 세워진 이 추상조각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폐기된 채 실존해 왔다. 어떤 의미에서냐면, 실존(existence)이란 말의 어원을 살려 표현할 경우, 이 조각들이 시민, 혹은 주민의 구체적인 삶의 바깥에 그냥 우두커니 서있어 왔을 뿐이라는 뜻에서이다. 80년대를 배경으로 제작되어 이제는 공원 안에 방치도어 있는 추상조각들을 위해서 박용석은 튀는 색깔의 옷을 만들어 입힌다. 색상은 발랄하나 문양은 예비군복의 그것이다. 보이지 않아야 하는 위장복의 기능은 그 색상을 통해 전복된다. 원래의 의도로 돌아가 보면 공공미술이란 분리되어 있는 예술과 사회, 작품과 현실 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사이로 개입하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개입한다(intervene)’는 것은 일차적으로 무엇인가 두 개 사이에 오거나 있거나 놓이는 것을 뜻한다. 그 두 개는 공간적으로 떨어진 것일 수도 있고 시간적으로 떨어진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개입이란 그 사이에 발생하는 것이며, 때로는 그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과 알력과 내홍을 해결하거나 저지하기 위해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틈새에 어거지로 끼여드는 것이기도 하다. 사이가 벌어진 양쪽에서 보자면 불필요하거나 부적절한 제 3자가 사이를 파고드는 것이다. 이것이 참여가 되느냐 중재가 되느냐 아니면 이간질이 되느냐는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르게 판명 난다.

박용석은 80년대와 현재라는 서로 다른 시간 속으로 혹은 추상미술과 공원이라는 서로 다른 사이트로 또는 오브제와 프로세스 아트(Process Art)라는 서로 다른 미디어 사이로 끼여들어 무엇인가 촉발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개입하는 미술의 핵심은 완성된 결과보다는 만들어가는 과정을 중시하고 여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서 찾아진다. 특히 남성적, 권위적, 정주적인 개념의 미술을 거부하는 이 미술의 큰 방법론적 전력은 해체(deconstruction)와 재구축(reconstruction)이다. 공공미술은 해체와 재구축의 개입 전략을 통해 살벌하고 삭막한 도시 공간을 우리가 살만한 공간으로 만들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시도 중에서도 나는 닉 웨이츠(N. Wates)가 명명하고 제안한 액션 플래닝에 주목한다. 이 액션 플래밍의 요체는 “지역 공동체의 여러 구성요소들의 협업을 토대로 관련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도시 설계와 디자인 방식”다. 도시에 대한 테크로크라트의 독재를 지양하는 대신에 도시 및 공공영역에 대한 시민적 권리를 복원시키는 대안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즉, 미술이 놓이는 공간의 의미를 물리적인 장소 개념 이상으로 확장하거나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개입미술이 추구하는 이념과 성취 노력은 단지 미술가 개인의 몫으로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민, 혹은 주민의 참여를 촉발시키거나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취지에서 창출된 프로젝트가 바로 이것이다. 풍족하다는 것, 혹은 적어도 자족적이라는 것은 적극적인 의미로는 무엇인가를 충분히 갖고 있어 여유가 있다는 것이며 소극적인 의미로는 위험한 결과 없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제 시민-관람객은 현대미술의 난해한 역사와 컨벤션에 대한 전문적 이해라는 위험 없이도 공공미술을 향유해야 한다. 박용석은 바로 이러한 위험물에 위장복을 입히고자 했다. 또한 폐기된 채로 실존해 온 환경조각품에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려 시도한다. 제도화되어 버린 나머지, 시민-관람객의 삶으로부터 너무나도 멀리 떠나버려서 소외된 작품에게 새 옷을 입혀주기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 공공미술의 새로움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 공공미술의 새로움을 강조하기 위해서 작가는 일부러 불온한 방식을 채택했다. 오브제로서의 공공미술을 선호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시도는 위험하다. 아직 공공미술 자신은 풍족하지 않은 것이다.

백지숙(큐레이터)

“Abstract Patterned Clothes for Sculptures” installation view / Clothes on Sculptures / 2003